오쿠다이라 마사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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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쿠다이라 마사요시는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로, 시모츠케 우츠노미야 번주 오쿠다이라 타다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68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문을 계승했으나, 중신 간의 칼부림 사건과 순사 소동으로 인해 데와 야마가타 번으로 감봉되었다. 그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후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신들의 불만을 샀고, 결국 후사가 없어 조카를 양자로 들였으나 40세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 양자가 가문을 잇고, 그의 생애와 관련된 사건들은 후일 '조루리자카의 복수'라는 에도 시대 3대 복수극 중 하나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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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이라 마사요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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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오쿠다이라 씨 |
이름 | 오쿠다이라 마사요시 |
원어 이름 | 奥平昌能 |
![]() |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간에이 10년 7월 21일 (1633년8월 25일) |
사망 | 간분 12년 7월 2일 (1672년8월 24일) |
어릴 적 이름 | 센푸쿠마루 |
다른 이름 | 규하치로 (통칭) |
계명 | 도쿠운인덴 기호 도야 대거사 |
묘소 | 도쿄도시나가와구미나미시나가와의 도카이지세이코인 |
관위 | 종5위 하대선량 |
막부 | 에도 막부 |
섬긴 주인 | 도쿠가와 이에쓰나 |
번 | 시모쓰케우쓰노미야 번 번주 → 데와야마가타번 번주 |
씨족 | 오쿠다이라 씨 |
부모 | 아버지: 오쿠다이라 다다마사, 어머니: 토리이 다다마사 딸, 계악원 |
형제자매 | 마사요시, 나이토 노부요시 정실, 모가미 요시아키라 계실, 유라 요리시게 실, 아키, 걸원 |
자녀 | 센푸쿠마루, 쿠라히메, 기쿠히메 등 |
양자 | 오쿠다이라 마사아키라 |
관직 계보 | |
전임자 | 오쿠다이라 다다마사 |
후임자 | 마쓰다이라 다다히로 |
직책 | 우쓰노미야 번 번주 (오쿠다이라 가문) |
대수 | 2 |
임기 | 1668년 |
야마가타 번 번주 | |
전임자 | 마쓰다이라 다다히로 |
후임자 | 오쿠다이라 마사아키라 |
직책 | 야마가타번 번주 (오쿠다이라 가문) |
대수 | 1 |
임기 | 1668년 ~ 1672년 |
2. 생애
오쿠다이라 마사요시는 간에이 10년(1633년), 시모쓰케 우쓰노미야 번宇都宮藩|우쓰노미야 번일본어주 오쿠다이라 다다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간분 8년(1668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독을 상속받았다.
아버지의 법요를 치르던 중 발생한 우츠노미야 코젠지 칼부림 사건과 오이에바라 사건으로 인해 데와 야마가타 번山形藩|야마가타 번일본어으로 2만 석 감봉 처분을 받았으나,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후견인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가벼운 처분으로 끝났다. 하지만, 가신들의 불만은 커져 조루리자카의 복수로까지 이어졌다.
간분 12년(1672년) 윤6월 25일, 마사요시는 위독해졌으나 후사가 없었다. 결국 조카인 5세의 고지로(후의 오쿠다이라 마사아키)를 양자로 들여 가독을 잇게 했다. 마사요시는 다음 달 7월 2일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출생과 초기 활동
간에이 10년(1633년), 시모쓰케 우쓰노미야 번宇都宮藩|우쓰노미야 번일본어주 오쿠다이라 다다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간에이 17년 10월 28일(1640년 12월 11일), 아버지 다다마사와 함께 에도 막부 3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를 알현했다. 쇼호 3년 11월 9일 (1646년 12월 15일), 겐푸쿠를 치렀다. 이듬해 쇼호 4년 12월 12일 (1648년 1월 6일), 사카키바라 다다쓰구와 함께 어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이미 증조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공적이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큰아버지 마쓰다이라 다다아키의 위세가 드높아, 후다이의 중진이라고 할 수 있는 가문이었다.
2. 2. 가독 상속과 우쓰노미야 번
간에이 10년(1633년), 시모츠케 우쓰노미야 번주 오쿠다이라 타다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간분 8년 (1668년) 아버지 타다마사의 사망으로 가독을 상속했다.아버지의 법요를 치르던 간분 8년 3월 2일 (1668년 4월 13일), 성 아래에 있는 보제사인 코젠지에서 중신들 사이의 사사로운 원한으로 칼부림 사건(우츠노미야 코젠지 칼부림 사건)이 일어났다. 마사요시는 한쪽 가신을 편들었고, 양쪽 모두 처벌하지 않았다. 게다가, 후에 "오이에바라 사건"이라고 불리는 국법에 저촉되는 중대한 순사 소동도 겹쳐, 8월에 우츠노미야에서 데와 야마가타로 2만 석의 감봉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쇼군 이에쓰나의 후견인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가벼운 처분으로 끝났다.
번의 재정에 대해 가신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폭발하여, 주군을 버리고 많은 사람들이 가중을 떠났다. 게다가, 원한을 품은 채 그들의 행동은, 후년에 에도의 3대 복수극으로 꼽히는 조루리자카의 복수로까지 발전했다.
2. 3. 데와 야마가타 번으로의 감봉
간분 8년(1668년) 아버지 오쿠다이라 타다마사가 사망하여 가독을 상속하였다. 같은 해 3월 2일(1668년 4월 13일), 보제사인 코젠지에서 중신들 간의 사사로운 원한으로 칼부림 사건이 발생하였는데,(우츠노미야 코젠지 칼부림 사건) 마사요시는 한쪽 가신을 편들었고, 양측 모두 처벌하지 않았다. 게다가, 후에 "오이에바라 사건"이라고 불리는 국법에 저촉되는 중대한 순사 소동도 겹쳐, 같은 해 8월에 우츠노미야에서 데와 야마가타로 2만 석의 감봉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쓰나의 후견인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가벼운 처분으로 끝났다.그러나 양측 모두 처벌하지 않는 번의 재정에 대해, 가신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폭발하여, 주군을 버리고 많은 이들이 가중을 떠났다. 게다가, 원한을 품은 채 그들의 행동은 훗날 에도의 3대 복수극으로 꼽히는 조루리자카의 복수로까지 발전했다.
2. 4. 조루리자카의 복수
간분 8년 (1668년) 아버지 오쿠다이라 타다마사가 사망하여 가독을 상속했다. 같은 해 3월 2일(1668년 4월 13일), 성 아래에 있는 코젠지에서 중신들 사이의 사사로운 원한이 칼부림 사건(우츠노미야 코젠지 칼부림 사건)으로 번졌다. 마사요시는 한쪽 가신을 편들었고, 양쪽 모두 처벌하지 않았다. 게다가, 후에 "오이에바라 사건"이라고 불리는 국법에 저촉되는 중대한 순사 소동도 겹쳐, 8월에 우츠노미야에서 데와 야마가타로 2만 석의 감봉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후견인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가벼운 처분으로 끝났다.가신들은 양쪽 모두 처벌하지 않는 번의 재정에 불만을 품고 주군을 버리고 가중을 떠났다. 이들의 원한은 훗날 에도 3대 복수극으로 꼽히는 조루리자카의 복수로까지 발전했다.
2. 5. 사망과 가독 상속
간분 8년(1668년), 아버지 오쿠다이라 타다마사가 사망하자 가독을 상속받았다. 아버지의 법요를 치르던 중 가신들 간의 칼부림 사건이 발생했고, 마사요시는 한쪽 가신을 편들어 양쪽 모두 처벌하지 않았다. 게다가 국법에 저촉되는 순사 소동까지 겹쳐, 우쓰노미야에서 데와 야마가타로 2만 석 감봉 처분을 받았으나,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후견인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가벼운 처분으로 끝났다.그러나 가신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커져 많은 이들이 가문을 떠났고, 이는 훗날 조루리자카의 복수로까지 이어졌다.
간분 12년 윤6월 25일(1672년 8월 17일), 마사요시는 위독해졌으나, 장녀와 적남 센푸쿠마루가 모두 사망하여 후사가 없었다. 고토 모리카츠의 차남이자 마사요시의 조카인 5세의 고지로를 양자로 들여, 다음 달 7월 1일(8월 23일) 가신 시마다 이즈모노카미가 노중에게 양자 신청을 하여 허락받았다. 다음 날인 2일, 마사요시는 40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5세의 고지로는 마사요시의 셋째 딸 기쿠히메(9세)와 결혼하여 가독을 상속받았다. 이가 바로 오쿠다이라 마사아키이다.
3. 인물됨과 일화
마사요시는 성품이 난폭하여, 뒤에서는 "황대선"이라고 불렸다. 쫓아 죽음 사건으로 순사한 스기우라 우에몬노죠도 순사가 금지된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사요시가 권유했기 때문에 순사했다. 흥선사 사건에서 공평함을 잃은 처벌에 실망하여 마사요시에게서 떠난 가신은 40명 이상이었다.
3. 1. 다카와 강에서의 일화
세자 시절부터 이미 난폭했던 듯하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마사요시가 성 근처의 다카와에서 낚시를 하는데, 평소와 달리 강물이 흐려 물고기가 잡히지 않았다. 가신에게 상류를 조사하게 하자, 야마부시 여러 명이 미즈고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사요시는 격노하여 야마부시 2명을 처형했다. 베어진 야마부시의 제자 9명은 이를 원망하여 막부에 호소하려 했지만, 그 전에 마사요시는 제자도 모두 처분했다.4. 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오쿠다이라 타다마사 |
어머니 | 케이가쿠인 (토리이 타다마사의 딸) |
부인 | 불명 |
아들 | 센푸쿠마루 |
차녀 | 쿠라히메 (마츠다이라 노리하루의 정실) |
삼녀 | 키쿠히메 (1664-?) (오쿠다이라 마사아키의 정실) |
양자 | 오쿠다이라 마사아키(1668-1695) (고토 모리카츠의 차남 또는 삼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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